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문단 편집) == 전개 ==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들어설 예정으로 한창 터파기 공사가 진행중이던 [[대구백화점]] 상인점[* 이때의 사고로 보상금 지출 증가 등으로 결국 해당 부지를 롯데에 매각했고 2004년 [[롯데백화점 상인점]]이 들어섰다.] 공사 현장에서 토목 공사를 담당한 하청업체 (주)표준개발의 직원들이 굴착 행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 현장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측에서 이 공사 때문에 지반이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는 항의를 전달 받은 상태였다. 조사 결과 백화점 공사 현장도 장기적으로 지반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이들은 표준시방서에 없던 보링 그라우팅(Boring Grouting)[* 드릴로 땅 속 깊이 구멍을 낸 후 그 안으로 시멘트 같은 주입재를 넣어 지반의 강도를 올리는 공법.] 작업을 해서 지반을 보강하기로 결정하고 임의로 천공기 2대를 동원해 현장 지반에 지름 8 cm, 깊이 10 m의 구멍 40개를 뚫기로 했다. 천공 작업을 하려면 먼저 굴착 허가를 받고 도시가스 등 지하 매설물의 도면 등 안전성을 확보해야 했지만 그런 것 없이 사건 전날인 27일, 22개의 구멍을 뚫었고 나머지 구멍을 뚫기 위해 사고 당일 오전 7시부터 천공 작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7시 30분, 이들은 천공 작업 도중 지하 1m 70cm 지점에 묻힌 도시가스 중압관에 지름 8 cm의 구멍을 내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잠시 후 가스 냄새를 맡은 현장소장과 천공작업자 2명은 작업을 중단하고 현장사무소에 이 사실을 통보한 후 대구도시가스에도 가스누출 신고를 했다. 이때가 사고 발생 10분 전인 7시 42분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가스관에서 새어나온 고압의 가스가 하필 인근에 매설된 파손된 우수관을 통해 유입되고 있었다. 우수관으로 유입된 가스는 또 여기에 연결된 하수관을 따라 이동한 후 100 m 떨어진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장으로 유입되었다. 당시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는 인부 100여명이 지하 20~30m 지점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가스 냄새를 맡은 공사 팀장 중 한명이 7시 45분쯤 가스 냄새가 난다며 현장사무소에 연락을 하기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이 현장에서는 용접 작업도 진행되고 있었고 결국 20분간 현장에 유입된 가스 1만㎥에 불이 붙고 말았다.[* 사건 당일 매스컴에선 다들 "지하철 공사장에서 터졌으니 당연히 지하철 공사장에서 과실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당일 [[영남일보]] 기자가 사건 취재를 하다가 표준개발 쪽에서 "공사 중 가스관을 건드렸다"고 '''대구도시가스에 신고한 걸 찾아내서''' 바로 보도했다. 이에 경찰은 수사 방향을 돌려 표준개발 인원들을 사법 처리했는데 이들 측에서는 모함이라고 펄쩍 뛰었다.] 오전 7시 52분, 대량의 가스가 폭발하면서 50m에 달하는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400m에 달하는 지하철 건설 현장에 설치된 복공판[* 지하에서 공사가 있을 경우 지상에 아스팔트 대용으로 덮어두는 대형 강철판을 말한다. 1개당 300kg 가까이 나가는데 이것들이 '''폭발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과 공사자재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시민들과 자동차들이 3~4층 높이만큼 튀어 오른 후 한꺼번에 떨어졌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 등 총 3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차량 150대 이상, 건물 80여 채가 파손'''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폭발 당시 튀어오른 복공판이나 고열, 공사장에 있던 철근 등의 구조물 때문에 크게 훼손된 시신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출동한 대구중부소방서 구조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철근 위로 떨어져 그대로 꽂혀 버린''' 참혹한 상태의 시신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사건 현장이 '''학교''' 근처[* 당장 근처만 해도 [[영남중학교(대구)|영남중학교]], [[영남고등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경북기계공업고등학교]], [[대구하이텍고등학교]], [[대서중학교]], [[효성초등학교(대구)|효성초등학교]], 상인여자중학교(현 [[상원중학교(대구)|상원중학교]]. [[남녀공학]]으로 바꾸면서 교명이 변경되었다.) 등이 있다. 이 중 영남중, 영남고, 대구상고는 위의 사진에서 보인다.]인 데다 '''등교 시간'''이라는 점 때문에 학생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유품으로 지하철 공사장으로 떨어진 잔해들 중에 피 묻은 책가방, 불에 탄 교과서, 참고서, 그리고 학생들의 시신들이 많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사진 중에 피범벅이 된 책가방을 수습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자원봉사자의 모습도 있었다. 특히 근처 [[영남중학교(대구)|영남중학교]] 학생들의 피해가 컸는데 사망자 101명 중 절반 가까이에 달하는 43명{{{-2 (교사 1명 포함)}}}이 영남중학교 학생이었다. 그나마 영남중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인근 중학교들은 그 날이 금요일이라서 모두 [[소풍]]을 나간 덕분에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예외로 그 날 [[화원동산|화원유원지]]로 소풍을 간 [[성서중학교(대구)|성서중학교]] 학생들 중 일부는 [[죽전동(대구)|죽전동]], [[감삼동]], [[용산동(대구)|용산동]]에서 화원으로 가기 위해 사고 현장을 경유할 확률이 컸으므로 사고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학생들에게 [[스마트폰|개인 휴대]] [[태블릿 컴퓨터|통신기기]](+ [[카카오톡]] 등의 [[모바일 메신저]])가 없었고 [[삐삐]]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아무나 다 가지지는 않은 만큼(1995년 기준으로는 삐삐 사용자가 700만 명 정도에 불과하였고 청소년층 중에서도 가지지 않은 경우가 결코 적지 않았다.), 소풍간 자녀의 안위를 확인할 수 없었던 많은 학부형들이 화원유원지로 울며 찾아와 자녀를 찾았다. 정작 교사와 학생 대부분은 사고 소식 자체를 모르거나 알아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몰랐던 터라 소풍 분위기는 매우 평화로웠다고 한다.] 사고 1주기 때인 [[1996년]]에 영남중학교 희생자 유족과 교사, 학우들이 쓴 글을 모은 책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resultType=&pageNum=1&pageSize=10&order=&sort=&srchTarget=total&kwd=%EC%98%81%EB%82%A8%EC%A4%91%ED%95%99%EA%B5%90&systemType=&lnbTypeName=&category=%EB%8F%84%EC%84%9C&hanjaFlag=&reSrchFlag=&licYn=&kdcName1s=&manageName=&langName=&ipubYear=&pubyearName=&seShelfCode=&detailSearch=&seriesName=&mediaCode=&offerDbcode2s=&f1=&v1=&f2=&v2=&f3=&v3=&f4=&v4=&and1=&and2=&and3=&and4=&and5=&and6=&and7=&and8=&and9=&and10=&and11=&and12=&isbnOp=&isbnCode=&guCode2=&guCode3=&guCode4=&guCode5=&guCode6=&guCode7=&guCode8=&guCode11=&gu2=&gu7=&gu8=&gu9=&gu10=&gu12=&gu13=&gu14=&gu15=&gu16=&subject=&sYear=&eYear=&sRegDate=&eRegDate=&typeCode=&acConNo=&acConNoSubject=&infoTxt=#viewKey=CNTS-00114484909&viewType=C&category=%EB%8F%84%EC%84%9C&pageIdx=10&jourId=|아! 그날 우리는]]>이 발행되기도 했는데 해당 도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며 2020년 전자책 형태로 디지털화되어 협약 공공/대학도서관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열람 가능하다. 또한 영남중학교 세심관 내 추모실에서도 책을 소장 중이다. 폭발 현장에 인접해 있던 상가들은 이 여파로 마치 폐허를 방불케 할 만큼 훼손되었고 근처 아파트 [[베란다]] [[새시]]는 강력한 폭발에 의해 모두 깨졌다. 또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도 굉음이 들릴 정도였다.[* 2km 정도 떨어진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구마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근처에서도 굉음이 들렸고, 직선 거리로 3km 이상 떨어진 감삼동 일대에는 매우 큰 굉음과 더불어 상가의 셔터와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훨씬 더 멀리까지도 굉음이 들렸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깨진 유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 재산피해 역시 상당했다. 이 와중에도 여러 의인들이 나타나 많은 생명을 구했다. 교통 정리를 하던 52세의 이용선 씨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5명의 목숨을 구하고 공사장의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다가 복공판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10여 미터 아래로 추락해 숨졌으며 29세의 버스 기사 임해남이 자신의 버스 승객들은 물론 근처 차량의 8명의 시민들도 구했다. [[http://www.kffpc.co.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9|#]][* 이 버스 기사는 사고 당시 인명구조에 대한 특별공로로 1996년 대구광역시에서 특별 채용하여 청원경찰로 시청에서 근무하다가 팔공산자연공원 관리사무소 관리팀에서 근무 중이며(KBS2 [[굿모닝 대한민국 라이브]] 2021년 11월 8일 방영분) 하술하는 121번의 버스 기사였다.] 다행히 버스의 승객 100여 명을 모두 구출했다고 한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2천 명의 대구 시민이 몰려들어 [[헌혈]]을 했으며 '''하루만에 전국 각지에서 40억 원에 가까운 성금이 모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